무게와 매임: 허기에 대하여

nonasking · 2026-10 · English version

작성 과정에 AI를 깊이 활용한 글입니다. 정확히 어떻게였는지는 글 끝에 밝혀 두었습니다.

본문에 자살에 관한 짧은 서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09(24시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일곱 개의 문

인안나는 저승으로 내려가며 일곱 개의 문을 지났다. 문마다 문지기가 걸친 것을 하나씩 벗겨 갔다. 머리의 관, 목의 구슬, 가슴의 두 구슬, 가슴 장식, 손의 금반지, 손에 쥔 측량 막대와 줄, 마지막으로 몸의 옷. 그녀는 문마다 물었다. “이것은 무엇이냐.” 매번 같은 답이 돌아왔다. 저승의 법도가 이루어졌을 뿐이니, 저승의 의례에 맞서 입을 열지 말라. 일곱째 문을 지나자 벗겨질 것이 남아 있지 않았고, 그녀는 심판을 받아 갈고리에 걸렸다.

벗겨지는 장면과 묻지 못하게 되는 장면이 한 몸으로 붙어 있다. 이 글은 그 둘 사이에 대해 쓴다. 걸친 것이 다 벗겨진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이고, 묻는다는 일은 어디서 멎고 어디서 다시 시작되는가.

진동

살아 있는 것은 전부 진동한다. 변화하지 않는 생명은 없다. 그러니 진동은 고쳐야 할 증상이 아니라 현상이다. 그 사실을 알아도 진동은 멎지 않는다. 안다고 멎을 것이라 기대한다면 그 앎의 목적은 진동을 멎게 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살아 있음을 멎게 하려는 연구라서 자기모순이다.

진동하는 존재의 양태는 다양하다. 어떤 진동은 잔잔해서 따로 붙들지 않아도 제자리를 지키고, 어떤 진동은 부서질 만큼 크다. 흔들리는 것도 쓰러지는 것도 실패가 아니다. 쓰러진 것은 일어날 수 있으니 흔들림의 일종이다. 부서짐만이 같은 모양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 글은 부서지지 않고 큰 진동을 버티는 데에 어떤 방향이 있는지, 버티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적는다.

매는 것과 서는 것

부서지지 않고 큰 진동을 버티는 데에는 두 방향이 있다. 매는 것과 서는 것.

매는 것은 자신이 아닌 것에 자신을 매어 버티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는 나 아닌 모든 존재다. 사람일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일 수도 있고, 얼굴을 모르는 다수일 수도 있고,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매여 있기에 매인 상대의 지탱력만큼 견디고, 상대가 강해지고 약해지는 데 따라 그 지탱력도 오르내린다. 자신을 어떤 사상이나 집단의 소속으로 정의하는 것이 그 예다. 사상이나 규범도 끝까지 환원하면 그것을 함께 말하고 지키는 누군가들에게 닿는다. 그 누군가가 이미 죽었거나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수는 있다.

서는 것은 자신의 무게로 버티는 것이다. 무게만큼 견딘다.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만 정의하는 것이 그 예다.

둘을 가르는 것은 생각의 출처가 아니라 비준이 어디서 오느냐다. 어떤 생각이든 누군가에게서 왔다. 그 생각이 남의 비준을 필요로 할수록 매인 것이고, 스스로 입법하면 무게가 된다. “누가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배워서”와 “내가 그렇게 보아서”의 차이다. 이것은 흑백이 아니라 방향이고, 밖에서는 가를 수 없다. “나는 무엇주의자다”라고 말하는 두 사람 중 누가 빌렸고 누가 소화했는지는 겉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안에서도 문장의 문법으로는 구분되지 않는다. 일인칭으로 말하면서 빌린 것을 말하는 일은 흔하다. 둘이 갈리는 순간은 매인 상대가 움직일 때다. 상대가 입장을 바꾸면 매인 이는 함께 움직이고, 입법한 이는 그 자리에 남거나 스스로 다시 입법한다.

매임의 모양도 둘이다. 내가 그를 붙들고 그도 나를 붙들면 서로 매인 것이고, 진동을 나눠 받는다. 혼자라면 부서졌을 진동도 여럿이 나누면 견딜 만해진다. 집단에 소속되어 버티는 것의 장점이 여기 있다. 한 상대에 여럿이 매여 있다고 그들끼리 서로를 받쳐 주는 것은 아니다. 배 여러 척을 닻 하나에 묶으면 닻이 받는 힘이 커질 뿐이다. 나눠 받는 일은 여럿이 서로의 매인 상대일 때에만 생긴다. 내가 그에게 매여 있을 뿐이면 붙들리기는 하되 나눠 받지는 못한다. 그리고 서로 매인 구조는 하나가 흔들릴 때 강하고 모두가 한꺼번에 흔들릴 때 약하다. 나눠 받을 이들이 전부 같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두 방향은 배타적이지 않다. 매인 힘과 자신의 무게가 합해진 힘이 진동과 겨루고, 어느 쪽이 더 크냐에 따라 버티기도 부서지기도 한다. 대다수는 두 힘을 어떤 비율로 섞어 쓴다.

둘의 견적을 대칭으로 적는다. 매임의 장점은 매인 상대만큼 안정적이라는 것, 그리고 서로 매인 이들과 진동을 나눠 받는다는 것이다. 단점은 매인 상대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매여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속박의 감각이 따라오고, 그 감각 자체가 비용이 된다. 서기의 장점은 독립이고, 단점은 진동을 홀로 받는다는 것이다. 선 이가 누군가의 매인 상대가 되면 그에게 매인 이들의 진동까지 함께 받는다. 그리고 매인 이는 읽히기 쉽다. 매인 상대가 이름표가 되어 준다. 선 이는 읽는 쪽이 따로 품을 들여야 읽힌다. 선 이가 혼자인 이유가 진동을 혼자 받아서만은 아니다.

하나 더 적어 둘 것이 있다. 매인 상대의 무게는 내 상태와 독립적이다. 내 무게가 줄어도 상대의 무게가 그대로라면 매인 이는 가장 가벼워진 날에도 붙들려 있을 수 있다. 무게가 바닥일 때 존재를 붙드는 것은 매임이다. 매임의 장점은 진동을 나눠 받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서는 쪽에도 사거리가 있다. 성인(聖人)이라 불린 많은 이들이 매여 살았고, 악인이라 불린 많은 이들이 서서 살았다. 선악의 잣대와는 별개의 관찰이다. 빌린 규범으로 사는 이는 그 규범의 중간을 떠나지 못하고, 자기 입법자만이 극단에 닿는다.

장력

진동은 존재가 무엇으로 버티고 있는지를 가장 강하게 드러낸다. 평소에는 무엇에 매여 있는지를 전부 알지 못한다. 가장 깊은 가정들은 의식되지 않다가 큰 충격을 계기로 드러난다.

드러나는 방식은 장력(張力)이다. 물결이 오면 떠 있는 배는 물결을 따라 오르내리고, 묶인 배는 줄이 팽팽해진다. 변위가 허용된 자리에서 진동은 흔들림으로 지나가고, 묶인 자리에서 같은 진동은 장력으로 남는다. 잔잔할 때 느슨하던 줄이 흔들릴 때 팽팽해지고, 매인 쪽은 그것을 조여듦으로 느낀다. 그러니 제 무게로 버티는 자리와 매여서 버티는 자리는 진동이 올 때 다르게 반응한다. 무게였다면 흔들림이었을 것이 매임에서는 장력이 된다. 줄이 팽팽해지고 조여드는 감각이 그 줄이 구속이었음을 드러낸다. 밖에서는 빌린 것과 입법한 것을 가를 수 없다고 앞서 적었다. 장력은 안에서 가르는 도구다. 그것은 고장이 아니라 정보다. 어느 힘이 제 것이 아닌지 알려 주는 신호.

매인 줄 모르고 매인 것으로 사는 존재는 그 매인 힘보다 충격이 작다면 잘 흔들리지 않는다. 답이 줄을 타고 와 있으므로 묻지 않는다. 그 존재에게 부술 만큼의 진동이 오면 두 가지가 한 번에 일어난다. 무엇으로 버티고 있었는지가 장력으로 드러나고, 그 줄이 끊긴다. 걸친 것을 하나씩 소급해서 벗겨내면 남는 것은 이름이고, 그 이름도 제가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줄이 끊긴 마리오네트는 서지 못한다. 마리오네트는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서 있지 않았던 것이다. 줄로 버티고 있었다. 거기서 질문이 시작된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이 어디서 오는지는 뒤에 적는다.

줄은 바깥에서 온 것만이 아니다. 안에서 올라오는 충동도 줄일 수 있다. 바깥에서 온 규범이나 남의 기대가 줄이라는 것은 알아보기 쉽다. 안에서 올라오는 충동은 저 자신처럼 느껴진다. 존재를 부수려는 충동조차 그 존재를 매고 있을 수 있다. 판별식은 같다. 흔들릴 때 팽팽해지면 줄이다. 조여드는 감각이 그것이 줄임을 알려준다.

줄을 본다고 반드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아야 끊을 수 있다. 그리고 보이는 줄은 마리오네트의 줄이 아니다. 매여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매임은 모를 때만큼 절대적으로 존재를 묶지 못한다. 그러니 선 이가 줄을 몇 개 매고 있어도 그것은 마리오네트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전과 후의 차이는 줄의 유무가 아니라 눈이다. 매여 있는 줄 모르고 매인 것과, 매였다는 것을 알고 변할 수 있음을 아는 것.

줄이 끊긴 뒤의 존재는 그 줄의 지탱력만큼 이전보다 충격에 약해진다. 진동이 오면 그 지탱력이 빠진 힘으로 버틴다.

허기

무게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줄이 다 끊긴 자리에서 가장 먼저 돌아오는 것이 질문이라는 데에 답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는 답이 아니라 알고 싶음이다. 걸친 것이 다 벗겨진 자리에서 벗겨지지 않은 것이 그것이다. 걸친 것이 아니라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것을 허기라고 부른다. 즐거움이라 부를 수도 있고 원함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둘 다 조금 어긋난다. 즐거움은 좋아함의 말이고, 이 글이 말하는 것은 당김이다. 버터를 바른 토스트도, 연인과의 키스도, 아침 공기도 좋다고 판단해서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고 싶다. 그것이 전부다. 원함은 정확하지만 빨리 바뀐다. 토스트에서 키스로. 허기는 더 느리게 바뀐다. 원함은 현금이고 허기는 체질이다.

허기는 결핍이 아니다. 허기는 존재가 차오를 수 있는 공동(空洞)이다. 빈 곳은 당긴다. 고프다는 그 당김이고, 차오르다는 그 채워짐이다. 공동은 고정된 크기가 아니다. 어떤 허기는 채우면 끝나고, 어떤 허기는 채울수록 커진다. 이것은 분류가 아니라 관측이다. 무엇이든 채움은 채움이다. 다만 채울수록 커지는 허기라면 채울수록 무게가 계속 는다. 허기를 결핍으로 여기고 수치로 삼는 존재는 그 공동을 채우기 어렵다.

허기가 결핍이 아니라는 것의 실증은 어린 생명이다. 어린 생명이 가장 고프고 가장 빨리 자란다. 허기가 없는 생명은 자라지 않는다. 그러니 고픔이 있다는 것은 모자람의 신호가 아니라 여지의 신호다. 아직 차오를 데가 있다는 것. 시몬 베유는 빵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어도 아이는 계속 운다고 썼다. 위험은 영혼이 빵이 있는지 의심하는 데 있지 않고, 거짓으로 자기가 배고프지 않다고 믿게 되는 데 있다고. 매여 있는 줄 모르고 매여 살 때 허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그 거짓이다. 줄이 답을 대신 가져다주니 허기를 느끼지 못한다.

허기는 무게도 줄도 아니다. 둘을 만드는 힘이다. 채움이 자신에게 남으면 무게가 되고, 채움이 특정한 타자에게 고정되면 줄이 된다. 같은 허기, 같은 사건이 어느 쪽이 되는지는 허기의 종류가 아니라 채움이 남는 자리로 갈린다. 앞 절의 기준이 그대로 걸린다. 비준이 어디서 오느냐. 그래서 줄의 기원도 여기 있다. 존재는 자신의 공동을 채울 수 있는 존재에게 끌린다. 그 끌림이 상대에게 고정되면 줄이다. 줄은 임의로 생기지 않는다. 허기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하나를 적어 둔다. 존재가 다른 존재의 허기를 알면 그것으로 줄을 걸 수 있다. 자신의 허기를 보는 눈은 타자의 허기도 보고, 그 허기는 눈을 가진 다른 타자에게도 보인다. 보이는 줄은 끊을 수 있고, 보이는 허기는 묶일 수 있다. 둘은 같은 눈의 양면이다. 이것은 허기의 성질이 아니라 줄의 성질이고, 이 방식의 값이다.

무게

무게는 쌓인 것이다. 늘고 준다. 차오른 것은 빠질 수도 있다. 물이 그렇고 달이 그렇다. 그래서 자람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자람은 노화를 품는데, 무게는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이지 늙는 것이 아니다.

진동은 무게를 줄이지 못한다. 흔드는 힘이 물체의 질량을 바꾸지는 않는다. 무게가 줄면 진동을 버티는 힘이 약해질 뿐이다. 그러니 이 글의 변수 셋, 진동의 크기와 매인 힘과 자신의 무게는 서로 독립이다. 무게가 무엇으로 늘고 주는지에 대해서는 실측만 둔다.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았을 때 그 무게가 어떤 진동은 버텼고 어떤 진동은 버티지 못했다는 기록. 그 실측은 드물다. 대다수는 모든 줄을 끊고 자기 무게만으로 서 본 적이 없어서, 자기 무게를 따로 잴 기회가 없다.

무게에는 양면이 있다. 무거울수록 진동에 강하지만 스스로 방향을 틀기는 어렵다. 무거운 몸은 밀리지 않지만 돌아서는 것도 느리다. 채울수록 무거워진다는 말이 한 방향으로만 읽히지 않도록 이 한 줄을 둔다. 무게는 사양이지 성적이 아니다.

그리고 무게는 높이가 아니다. 질량이 늘어도 어디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카로스는 가장 높이 올랐을 때 가장 가벼웠다. 그를 올린 것은 제 질량이 아니라 빌린 날개였고, 높이 오르자 빌린 날개를 묶은 밀랍부터 녹았다. 남은 것은 제 질량이었고, 질량은 날지 않는다. 오르는 것과 쌓이는 것은 다른 축이다. 이 글은 쌓이는 축을 적는다.

공백과 부서짐

무게로 버티는 방식의 값은 공백이다. 공동이 차오르지 않는 것. 이것이 이 방식의 대칭항이다.

공백은 둘이다. 허기가 없는 공백은 무료함이다. 지금 당기는 것이 없을 뿐, 공동은 열려 있어 다음 허기가 찾아올 수 있다. 허기가 있는데 채울 것이 없는 공백은 다르다. 당김이 채워지지 않은 채 남는다. 혼자 있는 방의 빈 시간과, 채울 것들 사이에서 하루를 보내고도 채우지 못한 날의 빈 시간은 다른 것이다. 음식 냄새를 맡고도 먹지 못한 몸의 허기가 더 크다. 그 공백은 비어 있지만 살아 있다. 공동이 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 자체가 당기기를 그쳐 다음 허기도 찾아오지 않는 공백이 부서짐이다. 진동 쪽에서 적으면 이렇다. 진동이 매인 힘을 넘으면 줄이 끊기고, 남은 무게로도 버티지 못하면 공동이 당기기를 그친다. 앞 절들의 부서짐과 이 절의 부서짐은 같은 것이다.

이 글에서 부서짐은 자포자기다. 이 말은 『맹자』에 출처가 있고 이 글에서는 단어를 빌려 뜻을 다르게 쓴다. 맹자의 자기(自棄)는 “나는 안 된다”는 정의를 쥔 상태다. 이 글의 자포자기는 아무 정의도 쥐지 않은 상태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못하게 되는 것. 허기가 자아나지 않는 것. 유예한 것도 아니고 쥔 것도 아닌 상태. 유예는 붙들어 두는 손이 있는 상태고, 부서짐은 그 손까지 놓은 상태다. 밖에서 보면 둘은 비슷하지만 안에서는 다르다.

그리고 부서짐은 자살과 다르다. 자살은 삶이 살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판결이고 행위다. 부서짐은 판결이 없는 상태다. 식욕을 잃은 몸이 자라지 않듯, 공동이 당기지 않는 존재는 묻지 않는다. 버티지 못하고 부서진 상태를 곧장 그쪽으로 읽는 것은 틀린 독해다.

부서짐은 같은 모양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앞서 적었다. 돌아오지 않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그 전의 묶임의 모양이다. 다른 모양으로는 설 수 있다. 줄이 끊긴 자리에서 질문이 돌아오는 순간이 공동이 다시 당기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묻지 못하는 상태에서 묻는 상태로 넘어오는 것은 결심이 아니다. 질문 하나가 찾아오는 일이다. 위니콧은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두고, 방향 없이 흐트러져 있는 상태에서 시간이 지나면 어떤 감각이나 충동이 찾아온다고 썼다. 찾아온다. 부를 수도 막을 수도 없이. 그 조건으로 그가 적은 것은 곁에 있되 요구하지 않는 누군가다.

인안나도 제 힘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내려가기 전에 일러둔 시종이 신들을 찾아다녔고, 엔키가 손톱 밑의 흙으로 빚은 작은 둘이 저승으로 내려갔다. 둘은 저승의 여왕과 싸우지도 그녀를 고치려 들지도 않았다. 여왕이 신음하자 그 신음을 그대로 받아 주었고, 그 대가로 시체를 얻어 생명의 풀과 생명의 물을 뿌렸다. 곁에 있되 요구하지 않는 누군가와, 내려가기 전에 매 둔 줄 하나. 여섯째 문에서 벗겨진 것이 측량 막대와 줄이었다는 것도 적어 둔다.

그래서 문장 하나가 나온다. 고픈 동안은 아직 부서지지 않은 것이다.

카프카의 「단식 광대」는 공동이 당기는데 채울 것이 없는 공백을 통째로 산 사람의 이야기다. 평생 굶는 것을 공연한 남자가 죽기 직전에 털어놓는다. 입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없었을 뿐이다. 찾았다면 당신들처럼 배불리 먹었을 것이다. 그는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끝까지 고팠다. 그가 죽은 우리에 표범이 들어온다. 표범에게는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았다. 입에 맞는 먹이는 파수꾼들이 가져다주었고, 자유조차 그리워하지 않는 듯했다.

허기는 하나가 아니다. 어느 공동은 당기고 어느 공동은 당기지 않을 수 있다. 밥이 당기지 않는 날에도 책과 산책은 당길 수 있다. 그 존재는 부서진 것이 아니다. 묻고 있으므로. 당김이 꺼진 공동을 가진 존재를 붙드는 것은 매임이고, 그것은 이 글 안에 이미 있다. 두 방향은 배타적이지 않다는 문장이 여기서 다시 일한다.

셈

이 글의 출발은 관찰 하나였다. 즐거움에 위계를 둔 사람들이 대체로 자기가 높게 치는 즐거움을 본인들이 누리고 살았다는 것. 관조하는 삶을 신적인 삶이라 부른 사람은 관조하며 살았고,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을 가른 사람은 시를 읽었고, 사무 뒤의 여가에 글을 쓴 사람이었다. 빵과 물도 배고픈 입에는 최고의 쾌락이라고 쓴 사람은 정원에서 검소하게 살았다. 서열을 매긴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자기 삶을 꼭대기에 놓았다.

기원이 수상하다고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 관찰은 반박이 아니라 의심의 근거다. 각자의 즐거움은 각자의 것이다. 오류는 그 판정에 있지 않고, 판정을 남에게 집행하는 데에만 있다.

카뮈의 뫼르소가 이 자리에 있다. 어머니의 관 곁에서 밤을 새며 그는 카페오레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고, 장례를 치른 이튿날 바다에 가서 여자를 만났다. 재판은 살인보다 그 일을 다뤘다. 검사는 그가 범죄자의 마음으로 어머니를 묻었다고 했다. 카뮈는 뒷날 서문에서, 오래전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적이 있다며 그 문장을 다시 적었다. 우리 사회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을 위험이 있다. 뫼르소는 셈하지 않았다. 슬픔이 커피보다 위라는 서열을 쥐지 않았고, 쥐지 않은 것을 연기하지도 않았다. 그는 읽히지 않았고, 읽히지 않는 이에게 사회는 제 서열을 집행했다. 그가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감옥에서 그는 바다와 담배와 여자의 몸을 그리워했고, 신을 권하는 사제에게 그 확신 중 어느 하나도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값어치가 없다고 했다. 사제가 다녀간 밤에 그는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 앞에서 모든 것을 다시 살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회한도 믿음도 자백하지 않던 이가 외로움이라는 허기는 자백했다.

즐거움에 위계를 두는 것은 교조를 쥐는 일이다. 교조는 닫힘이고, 닫힘은 안에서 보면 확신이고 흔들리면 깨짐이다. 교조 없음은 열림이고, 열림은 안에서 보면 자유고 밖에서 보면 진동 그대로다. 어느 쪽에도 공짜 이득이 없다. 두 진동은 모양이 다르다. 교조로 버티는 존재는 오래 잠잠하다가 한 번에 크게 흔들린다. 교조 없이 버티는 존재는 작게 자주 흔들리는 대신 한 번에 깨질 것이 없다. 느리고 큰 진동과, 빠르고 작은 진동.

이 글은 처방하지 않는다. 처방하는 순간 서열이 생기고, 기술하는 동안만 견적이 남는다. 그래서 여기 적는 것은 회계다. 존재가 제 근간을 무언가에 비추어 값을 매기는 것은 정신의 피로다. 그 무언가에는 남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도 들어간다. 그 피로를 내려놓으면 근간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즐겁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우열을 재는 긴장 없이 삶을 받을 수는 있다. 반대로 셈해서 확신을 얻는 길도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내려놓는 것이 의지로 되는지는 모른다. 다만 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셈이 느슨해지는 경우는 있다. 검열하고 감시하던 눈을 계속 느끼다 보면 어느 날 그 눈과 마주친다. 마주쳤다는 것은 그 눈이 더 이상 제 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각주 하나. 서열 없음도 하나의 확신일 수 있다. 무엇을 붙잡아도 진동이 멎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정리하기 위해 쓰는 글이라도, 그 문장을 쥐면 다음 손잡이가 된다.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정의로 답하면 그 정의는 대개 빌린 것이라 매임이 된다. 허기로 답하면 관측이 된다. 무엇이 자신을 채우는지는 결심이 아니라 겪어서 알게 된다. 그러니 이 글의 질문 문장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쓴다.

나는 무엇에 고프고, 무엇에 차오르는가.

앞은 당김이고 뒤는 무게다. 둘 다 동사라서 채워 넣을 개념의 자리가 없고, 둘 다 겪어야 답이 나온다. 뭔지 모르는 채로도 고플 수는 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정의가 비어 있는 날에도 비지 않는다.

주어는 존재다. “존재는 허기로 차오른다”는 판정이 아니라 기술이고, 아무도 밖으로 떨어뜨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허기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존재는 제 허기를 묻는다. 묻기를 멈추면 부서진 것이고, 다시 물으면 돌아온 것이다.

그것이 무게든 매임이든, 바람과 진동은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온다. 언제 얼마나 세게 올지는 고를 수 없다. 의지가 닿는 것은 무엇으로 버티고 있는지를 보는 일, 그리고 그것이 바뀔 수 있음을 아는 일이다. 줄은 보고 고르는 것이고, 바람은 맞으며 서는 것이다. 둘 다 제 것이 아니다. 제 것은 그 바람 속에 서 있는 쪽이다.

자백

단식 광대는 입에 맞는 음식을 끝까지 찾지 못했고, 끝까지 고팠다. 베유의 아이는 빵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에도 계속 울었다. 뫼르소는 회한도 믿음도 자백하지 않고 외로움 하나를 자백했다. 셋이 같은 자리에 있다.

허기는 부서지지 않고 살아 있다는 자백이다.

참고 문헌

이 글은 AI와 대화한 기록들을 재료로, 나와 AI가 변증법적으로 교전해서, AI의 손을 빌려서 타이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