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율

nonasking · 2026-11 · English version

작성 과정에 AI를 깊이 활용한 글입니다. 정확히 어떻게였는지는 글 끝에 밝혀 두었습니다.

타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면 둘이 떠오른다. 분사(焚死)에 대한 공포와 아름답다는 감동. 둘은 불을 보며 같은 순간에 오고,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 앞에 서 있으면 속으로 물음표만 늘어난다. 이 글은 그 상태의 이름을 찾는 글이다.

합치는 법

같은 대상에게 섞이지 않는 둘이 같은 순간에 들 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 두 방향이 있다.

하나는 중화다. 둘을 섞어 미지근한 하나로 만든다. 무섭고 아름다운 것 앞에서 “착잡하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착잡(錯雜)은 섞일 착, 섞일 잡이다. 섞였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적지 않는 단어다. 다른 하나는 억압이다. 한쪽을 의식 아래로 내리거나 부인한다. 무서움만 남기면 피하고, 끌림만 남기면 다가간다. 하나만 남기면 어떻게 행동할지가 정해지므로 편리하다.

두 방향 사이 어딘가에 합산이 있다. “매력적이지만 무서워.” “무섭지만 매력적이야.” 이 문장은 둘을 다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한쪽이 주(主)고 한쪽이 종(從)이다. ‘지만’은 앞을 깎아 뒤를 세우는 접속사다. 벡터 둘을 더해서 잔여 하나를 내고 그 잔여에 라벨을 붙인다. 이것 역시 라벨 하나만 남기는 방식이다.

셋째 방법이 있다. 둘을 다 들고 있는 것. 그 문장은 ‘고’로 쓴다. “무섭고 아름답다.” 한쪽을 깎지 않고 둘을 온전히 두는 병치(竝置)다. 인상들의 방향이 다른 만큼 더 큰 용량을 차지하고, 그만큼 비싸다. 이 글은 그 방식에 대해 쓴다.

어순

‘고’도 반쪽이다.

언어는 선형이다. 둘을 적으면 하나가 먼저 온다. “사랑하고 미워한다”에서 사랑이 앞에 있다. 애증(愛憎)에서도 애가 앞이다. love-hate도 그렇다. 어느 언어로 적어도 두 단어를 나란히 놓는 순간 순서가 생기고, 순서가 생기면 읽는 쪽은 앞을 바탕으로 뒤를 읽는다. 먼저 온 것이 주가 되고 나중 온 것이 종이 된다. ‘지만’을 피해 ‘고’를 썼는데 어순이 ‘지만’의 일을 대신한다.

문법이 병치를 담지 못한다. 그러면 병치는 두 단어로는 쓸 수 없다. 어순이 생기는 순간 합산이기 때문이다. 병치는 한 단어 안에 둘이 있을 때만 쓰인다. 둘을 적지 않고 하나를 적는데 그 하나가 둘인 단어. 그런 단어는 드물다.

한 단어 안의 둘

그런 단어의 계보가 있다.

파르마콘(φάρμακον). 그리스어로 약이고 독이다. 약과 독이 아니라, 약이고 독인 하나의 물질. 어순이 없다. 이 단어는 사물에 붙는다. 약초에, 물질에, 처방에.

데이논(δεινόν). 소포클레스가 『안티고네』의 합창에서 인간을 그렇게 불렀다. 많은 것이 데이논이지만 인간보다 더 데이논한 것은 없다고. 어원은 공포다. 그래서 기본 뜻은 무서운, 끔찍한. 그런데 같은 단어가 놀라운, 능란한, 강력한으로도 쓰인다. 공포와 경탄이 갈라지기 전의 단어다. 번역자들이 이백 년 넘게 하나를 골라야 했고 하나를 고르면 반을 잃었다. 이 단어는 인간에게 붙는다.

숭고(崇高). 공포와 매혹을 한 단어에 담은 것으로 가장 널리 쓰인 이름이다. 그런데 그 담는 방식을 보면 둘이 같은 순간에 있지 않다. 버크의 숭고에서 공포는 거리를 두고 올 때, 실제로 위협받지 않을 때, 고통이 물러난 자리에 오는 쾌(delight)로 바뀐다. 칸트의 숭고에서 상상력이 좌절한 다음 이성이 그 좌절을 넘어서며 고양이 온다. 둘 다 공포를 지나서야 쾌에 닿는다. 칸트는 그 움직임을 같은 대상에 대한 반발과 끌림이 빠르게 교체되는 떨림이라고도 썼지만, 교체는 동시가 아니다. 숭고는 한 단어 안의 둘이 아니라 한 단어 안의 순서다. 엄밀히는 병치가 아니다.

영어에도 이 계보의 단어가 있다. awe. 옛 노르드어의 공포에서 왔고 지금도 두려움과 경외를 한 몸에 둔다. 영어는 그 단어를 접미사에서 쪼갰다. awful은 공포 쪽을 가져가 “아주 나쁘다”로 닳았고, awesome은 경탄 쪽을 가져가 “굉장하다”로 닳았다. 반쪽들은 흔해지고 온전한 것은 드물어졌다.

그리고 전율(戰慄). 싸울 전, 두려워할 율. 그런데 戰에는 두려워 떤다는 뜻이 따로 있고, 전전긍긍의 전이 그 뜻이다. 慄의 둘째 훈이 떨릴 률이다. 두 글자가 다 떠는 것이다. 착잡의 두 글자가 다 섞이듯이. 쓰임을 보면 “공포에 전율했다”도 되고 “감동에 전율했다”도 된다. 사전은 그 둘을 못 담았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공포 쪽만 적었고, 우리말샘은 둘을 적되 감동 쪽에 “비유적으로”라는 단서를 달아 뒷번호로 밀었다. 문법이 병치를 못 담듯 사전도 못 담는다. 가르려다 반을 떨어뜨린다. 그래도 몸이 떤다는 것 하나는 어느 번호에도 똑같이 적혀 있다. 그 떨림이 공포인지 감동인지는 단어가 묻지 않는다. 사전이 물을 뿐이다. 파르마콘이 사물의 쓰임에 붙고 데이논이 사람에게 붙는다면, 전율은 대상 쪽이 아니라 보는 쪽에 붙는다. 대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쓰이는지 판단하기 전에 먼저 오는 몸의 상태. awe도 보는 쪽의 단어다. 다만 마음의 단어고, 쓰임이 경외 쪽으로 기울었다. 전율은 몸의 단어고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둘의 공통 성분이 있다. 무서움도 끌림도 각성이고, 몸은 각성의 출처를 구분하지 않는다. 출처를 묻지 않는 그 각성이 몸에 드러난 것이 전율이다.

전율과 공명

전율이 무엇인지 적기 전에 무엇과 다른지 적는다. 전율은 공명(共鳴)과 다르다.

공명은 같은 주파수의 두 진동이 서로를 키우는 것이다. 조건은 주파수의 일치고 결과는 진폭이 커지는 것이다. 상대가 떨면 나도 떨고, 그것이 같은 떨림이다. 상대가 슬프면 나도 슬프고 상대가 들뜨면 나도 들뜬다. 공감의 물리가 이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공포가 없다. 같은 떨림은 한계에 닿기 전까지는 위협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율은 그렇지 않다. 불은 떨지 않는다. 약이고 독인 흰 꽃 다투라도 떨지 않는다. 대상의 떨림과 별개로 내가 떤다. 그러니 전율은 상대의 진동을 받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거기 있어서 내 진동이 바뀌는 것이다. 큰 질량이 옆에 오면 작은 것의 궤도가 흔들린다. 상대가 흔들어서가 아니라 상대가 거기 있어서. 공명이 진동과 진동 사이의 일이라면 전율은 무게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크기가 아니라 다름

숭고론은 이 감정을 큰 것에 묶어 두었다. 폭풍, 절벽, 별하늘, 바다. 큰 것 앞에서 부서질 것 같고 그래서 끌리는 것. 그 묶음을 푼다.

작은 것 앞의 전율이 있다. 손바닥만 한 날다람쥐를 보면 “귀엽다”와 “깨물어 주고 싶다”가 같이 온다. 그 둘째를 심리학이 따로 재서 이름을 붙였다. 귀여운 공격성. 그 앙증맞은 것은 나를 부술 수 없는데 떨림은 선명하다.

그러니 전율의 조건은 크기가 아니다. 다름이다. 내 모양과 다른 것이 가까이 있을 때. 그 다름이 내게 걸릴 때. 큰 것은 다름의 한 종류다. 정확히는, 크기는 그 다름이 머릿속에서 차지하는 자리다. 작은 것도 이상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나와 다른 만큼 머릿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한다.

공포와 끌림

그러면 공포 쪽을 다시 적는다. 큰 것 앞의 공포는 내가 부서질 공포이고, 작은 것 앞의 공포는 상대가 부서질 공포다. 둘을 하나로 묶으면, 전율에 섞인 공포는 이 거리에서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몸의 신호다. 누구에게 일어나느냐는 그때그때 다르다. 신호 자체는 그것과 무관하다.

이것이 둘이 섞이지 않는 이유다. 끌림은 거리를 좁히려는 것이고, 공포는 그 거리의 값을 알기에 오는 것이다. 하나는 방향이고 하나는 값이다. 다른 종류의 정보라 합산할 수 없다. 둘은 같이 오고, 합쳐지지 않고, 그 앞에 선 몸은 하나의 출력을 못 내고 떤다.

거리

거리가 변수다. 거리를 두면 전율은 줄고 공명은 남는다. 공명은 주파수가 맞으면 멀리서도 유지되지만, 전율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가능한 거리 안에서만 온다. 그러니 가까워서 머릿속 자리가 커지는 것과 전율은 같이 간다. 물러서면 그것이 먼 별이라는 것이 보이고 떨림이 가라앉는다. 따라서 공포 없는 전율도 있다. 당혹과 크기와 아름다움만 있고 무서움이 없는 경우. 그것은 그 대상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가능한 거리 밖에 있다는 뜻이다.

같음 안에서도 전율이 오는 길이 있다. 상대와 주파수가 맞아 같이 떨다가 진폭이 내 구조가 견디는 한계에 닿는 순간, 상대는 멀쩡한데 내게는 균열이 온다. 그때 드러나는 것은 같음이 아니라 다름이다. 같은 떨림이 한계까지 가서야 둘의 구조나 성분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 준다. 병사들이 발맞춰 건너다 무너진 다리가 그 자리다.

여기까지 세어 둔 조건은 셋이다. 다름, 거리, 돌이킬 수 없음. 서로 다른 축이고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다름에 이르는 길은 둘이다. 처음부터 다른 것과, 같이 떨다가 한계에서 갈리는 것. 더 있을 것이다.

혐오

지금까지의 둘은 공포와 끌림이었다. 둘 다 당기는 쪽이다. 무섭고 끌린다는 것은 떨면서 다가가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떨림이 반대로 가는 경우가 있다. 떨면서 물러나는 것. 혐오(嫌惡)다.

이질적인 것 앞에서 떨림이 온다. 떨림은 아직 방향이 없다. 그다음에 둘 중 하나가 된다. 한국어는 그 둘을 따로 가지고 있다. 오싹함은 몸이 움츠러드는 떨림이다. 무섭거나 추워서 물러나는 쪽으로 이미 간 것. 전율에는 그 방향이 없다. 다가가는 쪽으로 처리하면 끌림이고 물러나는 쪽으로 처리하면 혐오다. 다가가면 닿고, 닿으면 내 모양이 그것에 쓸린다. 물러나면 모양은 지켜지고, 눈을 돌렸으므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른 채로 남는다. 혐오를 입에 넣기와 오염에 대한 거부로 본 연구가 그 구조를 적었다. 이질적인 것이 내 경계 안으로 들어올 것 같을 때 나는 반응. 닿기 전에 미는 것. 일종의 면역이다. 다만 이는 이질성에 대한 방증일 뿐 대상과의 접촉이 내게 어떤 영향을 줄지와는 별개다. 면역 반응은 독이 들어올 때도 약이 들어올 때도 일어난다.

다르게 생긴 몸이나 병든 몸 앞에서 오는 혐오가 이 자리에 있다. 떨림이 오고, 그것을 물러나는 쪽으로 처리한 것. 그 혐오는 그 사람이 독이라는 판정이 아니다. 내 경계가 반응했다는 방증이다. 같은 몸 앞에서 같은 떨림이 반대로 간 사람도 있다. 눈을 떼지 못하고, 더 가까이 가서 보는 사람.

그러면 두 반응이 한 축에 놓인다. 떨림이 왔는데 물러난 것이 혐오다. 떨림이 왔는데 다가간 것이 끌림이다. 혐오와 끌림은 반대편이 아니라 같은 떨림이 갈린 것이다. 이것을 정서로 번역하면 한 문장이 선다. 어떤 미움은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과 같은 문에서 돌아선 것이다. 이질성을 마주했을 때 그 면역의 열병을 어느 방향으로 처리하느냐가 갈림길이다.

같은 것

병치하기 어려운 성질을 가진 것들은 머릿속 도식(圖式)에 집어넣기가 어렵다. 약이고 독인 흰 꽃. 제 꼬리를 물어 죽이고 낳는 뱀. 대상이 극단의 속성을 함께 가질수록, 나와 다를수록 머릿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거기에서 전율이 온다. 그것은 공포를 품기도 하고, 끌림이나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 가든 거기서 눈을 떼기는 어렵다. 그것을 끌림으로 받은 것이 매료이고, 받다 못해 거리를 잃은 것이 황홀(恍惚)이다. 살갗을 덥히는 불과 살갗을 태우는 불은 같은 불이다. 숨을 틔우는 꽃과 숨을 멎게 하는 꽃은 같은 꽃이다.

참고 문헌

이 글은 AI와 대화한 기록들을 재료로, 나와 AI가 변증법적으로 교전해서, AI의 손을 빌려서 타이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