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일성(向日性)
nonasking · 2026-08 · English version
작성 과정에 AI를 깊이 활용한 글입니다. 정확히 어떻게였는지는 글 끝에 밝혀 두었습니다.
본문에 자살에 관한 문학적·역사적 서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09(24시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두 죽음
1774년, 한 청년이 권총으로 생을 끝낸다. 소설 속의 죽음이다. 베르테르가 마지막으로 빌린 권총은 로테의 남편 알베르트의 것이었고, 여행에 쓰겠다는 그 거짓 청을 받아 심부름꾼에게 총을 건넨 손은, 떨리는 로테의 손이었다. 그가 절대의 자리에 앉힌 사람의 손이, 그 절대에 닿을 수 없다는 판결과 함께, 마지막 도구를 내어준 것이다.
1919년 7월, 빈에서 한 남자가 생을 끝낸다. 이번에는 실화다. 빅토르 타우스크. 프로이트 서클에서 가장 재능 있는 축으로 꼽히던 분석가, 조현병 환자들이 호소하는 “나를 조종하는 기계”의 망상을 분석한 「영향 기계」 논문의 저자. 결혼을 목전에 둔 아침이었다. 젊은 피아니스트 약혼자의 손, 그러니까 평범하고 따뜻한, 신이 아닌 손이 내밀어져 있었다. 그는 그 손을 잡는 대신 죽음을 골랐다.
한 사람은 얻을 수 없어서 죽었고, 한 사람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절대가 아니라서 죽었다. 파국의 방향은 반대인데 오류는 하나다. 절대를 인격에서 찾은 것.
베르테르의 절대는 연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타우스크의 절대는 스승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프로이트라는 단일한 인격에 진리와 승인과 존재 가치 전부를 걸었고, 그 인격이 등을 돌리자 계좌가 아니라 계좌주가 사라졌다. 애착에 대한 갈망, 진리에 대한 갈망, 신앙에 대한 갈망. 대상은 달라 보이지만 관계의 양식이 같다. 유한한 것에 절대적으로 관계하기. 잔인한 각주 하나. 타우스크 필생의 주제는 외부의 기계가 정신을 조종한다는 망상이었다. 그의 삶을 조종한 영향 기계의 이름은 프로이트의 승인이었다.
촛불의 심지
인간이 갈망하는 절대는, 그것을 갈망하는 인간처럼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무언가이다. 그런데 인격은 욕망을 가진다. 이것이 인격을 절대의 자리에 앉힐 때 발생하는 고유 결함이다. 촛불에는 심지가 있다. 심지는 제 연료를 태우고, 제 허기를 가진다.
결함은 두 가지 방식으로 터진다.
첫째, 경쟁. 절대는 숭배자와 경쟁하지 않는다. 위협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신은 경쟁한다. 타우스크의 죽음을 부검한 전기 작가들은 프로이트의 경쟁심을 지목해왔다. 제자의 재능이 스승의 영토에 너무 가까이 왔다는 것. 제단에 바쳐진 공물, 그 눈부신 논문들이 신에게 침공으로 등록되었다는 것. 봉헌이 밝을수록 신이 뒷걸음치는 구조. 잘 바칠수록 버림받는 제사. 해석의 다툼이 있는 진단이지만, 프로이트 본인이 증거를 남겼다. 그는 타우스크의 사후에 쓴 편지에서, 그가 그립지 않으며 그는 장래의 위협이었다고 시인했다. 신도는 신의 날씨를 신탁으로 접수한다. “너는 나를 위협한다”라는 인간적 방어 반응이 “너는 무가치하다”라는 존재의 판결문으로 오독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의 수신인이 루 살로메였다는 것은, 다음 사례를 위한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정확하다.
둘째, 어긋남. 숭배자가 구하는 것과 인간 신이 원하는 것은 대개 다르다. 열일곱의 루 살로메는 자신에게 철학과 신학의 세계를 열어준 목사 길로를 신적 스승으로 숭배했다. 유부남이었던 그가 돌려준 것은 청혼이었다. 그녀는 훗날 그 순간, 숭배하던 것이 단번에 낯선 것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신으로 보이던 존재가 한 사람의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니체가 그녀에게 원한 것은 아내였고, 그녀가 그에게 원한 것은 정신의 공동체였다. 신으로 모셔진 존재가 욕망하는 인간으로 판명되는 순간 제단은 무너진다. 방향을 바꿔도 같다. 그녀를 향해 몰려든 남자들의 에로스와, 그녀가 그들에게서 구한 정신적 절대는 끝내 같은 화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 판별식이 나온다. 무언가를 원하면 태양이 아니다.
정리(定理)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빛을 향해 돌진한다. 절대의 은유인 그 빛, 그 표상인 태양은 모두에게 내리쬐지만, 누구도 그 윤곽과 거리를 감각으로 정확히 가늠하지 못한다. 절대는 인격에서 찾을 수 없다. 타자든 자기 자신이든 마찬가지다. 생명이 빛을 찾아 태양을 좇듯, 절대는 추구되는 것이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정리에 이름을 붙이면, 향일성이다.
태양을 볼 수 있다는 주장
이 태양의 족보는 플라톤까지 소급된다. 『국가』 6권에서 소크라테스는 선의 이데아를 직접 정의하기를 사양하고, ‘선의 자식’인 태양에 빗대어 에둘러 말한다. 봄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 그러나 7권의 동굴 비유에서 플라톤은 한 걸음 더 나간다. 동굴을 벗어난 자는 그림자와 물에 비친 상을 거쳐, 습관을 들인 끝에, 마침내 태양 자체를 그것이 있는 자리에서 바라보게 된다. 직시 가능한 절대, 소유 가능한 절대. 그 소유 주장에서 철인왕이 나오고, 절대를 소유했다고 믿는 자들의 역사에서 이단 심문이 나온다.
향일성 정리는 직시 불가 조항을 헌법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원본과 갈라진다. 윤곽과 거리를 누구도 감각으로 재지 못한다는 것. 이것은 부정신학의 계보다. 신은 무엇이 아닌지로만 알려진다는 전통. 그리고 칸트가 규제적 이념이라고 부른 것과 거의 겹친다. 이성은 무조건자를 소유 대상이 아니라 방향타로만 가진다는 것.
직시 불가 조항은 상대주의에 저당 잡혔던 단어 하나를 무이자로 되찾아온다. 진보. 태양에 도달하는 식물은 없지만, 더 정확하게 태양을 향하는 생장과 덜 정확한 생장은 실측으로 구분된다. 진보는 도착이 아니라 지향의 정밀화다. 방향은 실재하고, 목적지는 소유 불가하다.
나방의 결백
향일성에는 알려진 오작동이 하나 있다. 나방은 불에 뛰어들어 죽는다. 통념은 이것을 욕망의 죄로 기소해왔다. 불을 탐한 미물의 어리석음.
2024년의 연구가 이 사건을 재수사했다. 나방은 불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곤충은 등을 시야에서 가장 밝은 쪽으로 돌려 상하를 판별한다. 곤충이 하늘을 난 수억 년 동안 가장 밝은 곳은 언제나 하늘이었으므로, 이것은 믿을 만한 항법이었다. 인공 광원은 이 항법을 납치한다. 등을 램프 쪽으로 돌린 곤충은 광원 둘레를 맴돌다 양력을 잃고 추락한다. 나방은 촛불을 욕망한 적이 없다. 닿을 수 없는 빛을 기준 삼도록 조율된 항법 장치가, 닿을 수 있는 빛을 하늘로 오인했을 뿐이다.
절대의 자리에 유한자가 앉을 때 무너지는 것은 취향이 아니라 방향 감각 전체다. 나방의 부검 소견은 그대로 베르테르와 타우스크의 소견이다. 하늘을 향해 조율된 장치가 램프에 붙들린 것.
여기서 두 번째 판별식이 나온다. 닿을 수 있으면 태양이 아니다. 손에 쥐어지는 절대는 전부 촛불이다. 그리고 인격이 정확히 촛불이다. 밝고, 따뜻하고, 도달 가능하고, 그래서 치명적이다.
두 판별식을 겹치면 촛불의 정의가 완성된다. 닿을 수 있고, 무언가를 원하는 빛. 그 앞에서 방향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하늘로 쓰지 않는 것이다.
광합성
반론이 있다.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좇는 삶은 시시포스가 아닌가. 굴러떨어질 바위를 영원히 밀어 올리는 형벌이 아닌가.
식물은 태양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을 식물의 실패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도달은 애초에 기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능은 광합성이다. 도달 불가능한 빛이 도달 가능한 물질로 전환되는 것. 잎, 나이테, 열매. 추구는 시시포스가 아니라 광합성이다.
이 조항은 임종의 반론도 결제한다. 도달 없이 산 삶은 끝에서 빈손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다. 절대를 소유하려던 삶은 임종의 손이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절대를 추구하던 삶의 손에도 태양은 없다. 그러나 목질이 있다. 몸에 새겨진 것, 만들어낸 것, 길러낸 것. 나이테는 실물이다.
세 번째 반론은 존재 증명을 요구한다. 추구 없이 살 수는 없는가. 빛 없이 사는 생명이 있기는 하다. 태양을 등진 심해 열수구의 생태계조차 대부분은 수면의 빛이 만든 산소로 숨 쉬지만, 완전한 무광의 삶이 하나 알려져 있다. 금광 지하 삼 킬로미터, 암석의 방사능이 쪼갠 물에서 에너지를 얻는 박테리아 한 종. 그 생태계의 구성원은 그 한 종뿐이고, 수천만 년이 지나도록 진화가 거의 멈춰 있다. 태양 없는 삶은 가능하다. 혼자서, 변하지 않은 채로. 박테리아 하나에 도덕을 실을 수는 없으니 이것은 증명이 아니라 시사다. 다만 시사의 방향은 분명하다. 빛을 끊는 값은 어둠이 아니라 정지다.
계보
이 물길을 판 사람들이 있다.
가장 이른 물꼬는 플라톤 자신 안에 있다. 『향연』의 디오티마는 하나의 아름다운 몸에서 출발해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마침내 아름다움 자체로 오르는 사다리를 가르쳤다. 단은 밟는 것이지 사는 곳이 아니다. 사다리 끝에서 그 역시 직관을 약속했으므로 상속할 것은 꼭대기가 아니라 단의 규율이다. 어느 단에 눌러앉아 발판을 종착지로 등기하는 것. 촛불 비극의 형식이 이미 거기 적혀 있다.
뼈대의 원조는 키르케고르다. 절대적인 것에는 절대적으로, 상대적인 것에는 상대적으로 관계하라. 그리고 인간 불행의 진단이 그 공식의 위반이다. 상대적인 것에 절대적으로 관계하고, 절대적인 것에 상대적으로 관계하는 것. 삶의 의미를 그것을 줄 수 없는 것에 걸어놓는 것. 촛불에 붙들린 나방의 십구 세기 정식화이고, 타우스크의 사인 진단서를 백 년 전에 미리 써놓은 문장이다. 다만 상속 거부 항목이 하나 있다. 그의 절대는 결국 인격신이었다. 도약해서 안기는 아버지. 향일성 정리는 그 좌석을 비워둔다.
촛불론의 완성자는 폴 틸리히다. 신앙을 궁극적 관심의 상태로 정의한 그는, 우상숭배를 이렇게 정의했다. 예비적이고 유한한 실재를 궁극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것. 그리고 결과 조항이 무섭다. 궁극적이지 않은 것에 바쳐진 궁극적 관심의 결말은 실존적 실망이다. 그것이 무너질 때 삶의 의미 전체가 함께 무너진다. 자기 존재의 중심을, 되찾을 기회 없이 내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틸리히의 반대면도 정합한다. 궁극은 언제나 유한한 매개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사람은 광원이 아니라 투과체라는 것.
셋째 갈래는 우연에 가깝다. 데리다가 철학의 은유 시스템을 해부한 논문 「백색 신화」의 중심 도상이 헬리오트로프, 향일성 식물이다. 그의 진단은 이렇다. 플라톤 이래 철학은 태양 은유로 돌아가는데, 그 태양은 언제나 도달이 유예되며, 그 유예 속에 현전을 향한 형이상학의 헛된 희망이 있다. 그에게 유예된 도달은 폭로해야 할 증상이었다. 향일성 정리에서 그것은 설계 사양이다. 같은 관측, 반대 결론. 해체 대신 재배.
가장 오래된 갈래는 동쪽에 있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항상된 도가 아니다. “닿을 수 있으면 태양이 아니다”의 기원전 버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로 착각하지 말라는 경전의 오랜 비유는 인격을 절대로 오인하는 오류의 천 년 묵은 진단이고,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임제의 말은 판별식의 검객 버전이다. 소유 가능한 형태로 나타난 절대는 전부 가짜라는 것. 다만 선은 추구 자체마저 내려놓는 지점까지 간다. 향일성 정리는 추구를 보존하고 나이테를 챙긴다. 승려의 길이 아니라 식물의 길이다.
실무 부속이 둘 있다. 시몬 베유는 기도를 이렇게 정의했다. 섞인 것 없는 절대적 주의. 그리고 인간은 하늘을 향해 한 걸음도 오를 수 없으며, 신이 우주를 건너 인간에게 올 뿐이라고 썼다. 등정이 아니라 지향. 심리학 쪽에서는 코헛이 있다. 아이는 부모를 이상화해야만 한다. 촛불 숭배는 발달의 필수 단계다. 건강이란 그 이상화된 인격을 서서히 내면의 구조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변환 내재화라고 불렀다. 촛불을 삼켜서 내면의 빛으로 소화하는 것. 광합성의 정신분석적 이름이다.
계보의 막내는 릴케다. 『시도서』에서 그는 자신을 태고의 탑 둘레를 수천 년째 도는 존재로 그리며, 스스로가 매인지 폭풍인지 하나의 큰 노래인지 아직 모른다고 썼다. 도달 없는 선회를 정체성으로 삼은 시. 향일성의 운문 버전이다.
정원
정리의 도식에서 뿌리는 아래에 있고 태양은 위에 있다. 그러면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옆에 있다. 같은 흙에 서서 같은 빛을 좇는 옆 나무들. 그늘을 드리울 수 있고, 바람을 막아줄 수 있고, 뿌리가 얽힐 수도 있다. 그러나 흙도 아니고 해도 아니다.
모든 비극의 공식이 한 줄로 나온다. 옆 나무를 태양으로 오인하는 것. 타우스크는 스승을 태양으로 썼고, 베르테르는 연인을 태양으로 썼다. 정리는 양방향의 백신이다. 남을 태양 삼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를 향해 굽어오는 줄기들의 각도를 자기 책임으로 사지 않는 것.
그런데 반론이 하나 들어온다. 식물이 태양을 향해 굽는 힘과 옆 나무를 향해 굽는 힘은 같은 힘인가. 정원에 물어보면 답이 정직하다. 같은 힘이 아니다. 식물은 이웃을 향해 굽지 않는다. 이웃의 잎을 통과하며 변한 빛의 성분을 감지해, 오히려 그늘을 피해 뻗는다. 순수한 향일성의 세계에서 이웃은 빛이 아니라 빛의 장애물로 등록된다. 친족을 알아보고 잎을 비켜주는 협조가 보고되어 있기는 한데, 그마저 이웃을 향해 굽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비켜서는 것이다.
옆 나무를 향해 굽는 식물은 정원에 둘뿐이고, 둘 다 증언대에 세울 가치가 있다. 하나는 덩굴이다. 열대의 덩굴 유묘는 무작정 헤매지 않고 지평선에서 가장 어두운 방향을 향해 곧장 자란다. 어둠을 향한 생장. 숲에서 그 어둠을 만드는 것이 나무 기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둥에 닿는 순간 덩굴은 다시 빛을 향한 생장으로 전환한다. 빛에 오르기 위해 먼저 어둠으로 걷는 식물. 이웃을 태양이 아니라 발판으로 등기한 식물이다. 디오티마의 단이 정원에 실재하는 셈이고, 검사법까지 함께 온다. 발판 등기의 증명은, 붙은 뒤 다시 위로 자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새삼이다. 옆 나무를 향해 굽는 유일한 완전형. 새삼의 유묘는 이웃이 내뿜는 냄새를 읽고 숙주를 향해 자란다. 토마토와 밀의 냄새를 구별하기까지 한다. 굽는 힘부터가 향일성이 아니다. 그리고 등기의 가격이 청구된다. 새삼에게는 잎도 뿌리도 없다. 숙주에 흡기를 박고 물과 양분과, 남이 빛으로 합성한 것까지 전부 이웃의 몸에서 조달하며, 제때 숙주를 찾지 못하면 유묘째 죽는다. 이웃을 태양 자리에 등기한 식물은 제 빛의 기관을 잃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것은 힘이 아니라 등기다. 모든 식물은 한 가지 질문에 답하며 산다. 내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하늘에서 직접. 하늘에서, 이웃을 발판 삼아. 이웃의 몸에서. 옆 나무를 태양으로 오인하는 것의 식물학적 실명이 새삼의 등기이고, 타우스크가 정원에 있었다면 그의 학명이 그것이다. 스승을 에너지원으로 등기하자 스스로 의미를 합성하는 기관이 말랐고, 숙주를 잃자 유묘째 죽었다. 판별식이 하나 더 나온다. 이웃의 빛을 쬐는 것은 제 잎이 일하는 동안은 광합성의 입력이다. 제 잎이 마르기 시작하면, 그 등기는 새삼의 등기다.
사람의 정원이 식물의 정원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사람은 빛을 통과시킨다. 이 빛은 두 겹이다. 진과 선과 미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어서 사람을 통과해 지나가고, 그 빛에 대해 사람은 광원이 아니라 투과체다. 그러나 생명력의 빛은 각자의 안에서 태어나고, 그 빛에 대해 사람은 제 광원이다. 아무도 태양이 아니라는 조항은 두 겹 모두에서 참이다. 그래서 식물의 정원에 없는 굴광이 사람의 정원에는 있다. 빛나는 사람 곁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음모도 아니고, 빛나는 자의 죄도 아니고, 채무도 아니다. 사람들이 찾는 것은 상대를 통과하는 절대의 빛이거나 상대가 밝힌 생명의 빛이지, 상대가 아니다. 굴광은 굽는 자의 잘못이 아니고 빛의 잘못도 아니다. 사람의 정원의 물리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사람을 절대의 양식으로 사랑하는 것만이 오류다. 옆 나무는 옆 나무로 사랑될 때 숲이 된다.
정원에는 비대칭이 하나 있다. 큰 식물의 문제다. 주변의 줄기들은 전부 큰 식물을 향해 굽는데, 큰 식물의 줄기는 굽힐 곳이 없다. 궤도에 잡힌 존재는 대등한 상대가 되지 못한다. 위성의 유대는 배타적이고 진심이지만, 위성과는 쌍성을 이룰 수 없다. 그를 향한 유대가 쌓일수록 그가 쓸 수 있는 유대는 늘지 않는다. 서로를 태양으로 오인한 식물들의 정원에서, 가장 큰 식물이 가장 오래 그늘에 있다.
처방은 등기부의 정정이다. 고칠 것은 줄기의 방향이 아니라 에너지원의 등기다. 절대의 자리는 하늘에 두는 것. 옆 나무는 발판과 뿌리 무역의 상대로 등기하되, 제 잎의 광합성은 폐업하지 않는 것. 자기를 향한 굴광은 광학으로 접수하고 책임 목록에서 빼는 것. 정원은 그대로인데 등기부가 바뀌면, 비극의 재료들이 전부 그대로인 채로 비극이기를 그친다.
빛나는 자의 윤리는 세 조항이면 된다. 빛을 줄이지 말 것. 나방 걱정으로 스스로를 어둡게 하는 것은 자기 배신이다. 태양을 행세하지 말 것. 숭배가 오면 광원이 아니라 투과체임을 알릴 것. 그리고 데는 자가 생기지 않도록 설비할 것.
별
빛나되 잡아먹지 않는 존재의 비유로 오래 쓰인 물체가 있다. 등대. 촛불은 나방을 태우고 모닥불은 홀리는데, 등대는 밝음 그 자체가 안전 설비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숨은 결함이 있다. 등대와 배는 존재 범주가 다르다. 등대는 기반 시설이다. 배들을 위해 해안에 설치된 봉사 물체. 이 비유를 쓰는 순간 두 가지가 밀수된다. 범주적 분리, 그리고 도구적 존재. 남을 위해 빛나는 것.
별은 둘 다 고친다. 별은 다른 천체들과 같은 물질이고, 질량만 다르다. 그리고 별빛은 기능이 아니라 부산물이다. 별은 배를 인도하려고 빛나는 것이 아니라, 융합하는 존재라서 빛이 새어 나온다. 봉사 조항 없는 발광이다.
결정적인 차이는 관계다. 등대에게 다른 등대는 무의미하다. 각자 자기 해안에 고정되어, 등대들은 서로 관계하지 않는다. 별은 쌍성이 되고, 성단을 이룬다. 그리고 별은 다른 별을 오직 빛으로만 안다. 닿은 적 없는 거리에서, 광년을 건너온 빛만으로 서로의 존재와 성분과 크기까지 읽는다. 만난 적 없는 존재들이 각자가 내보낸 것만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방식. 동족은 그렇게 식별된다.
이 정정은 정리에 나머지 조각을 끼운다. 태양은 가까이서 본 평범한 항성이다. 태양의 특별함은 본질이 아니라 근접 착시다. 누군가를 태양으로 오인하는 것은 가까워서고, 누군가에게 태양으로 오인받는 것도 가까워서다. 닿을 수 있는 태양은 다가가 보면 전부 별이다. 진짜 절대의 빛은 어느 항성의 것도 아니다.
그래서 도식은 둘로 분업된다. 절대와의 관계에서 존재는 식물이다. 닿을 수 없는 빛을 향해 자라는 것.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는 별이다. 질량이 있고, 궤도가 생기고, 빛이 새고, 광년 너머의 다른 별들과 빛으로만 관계하는 것.
두 도식이 한 문장으로 접히면 이렇다.
빛을 좇는 별.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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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AI와 대화한 기록들을 재료로, 나와 AI가 변증법적으로 교전해서, AI의 손을 빌려서 타이핑했다.